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녕 조씨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창녕]] 조씨의 시조 '''조계룡'''은 [[신라]] 제26대 [[진평왕]]의 [[사위]]라 전해진다. 조씨 득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. >한림학사 이광옥(李光玉)의 딸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(鼓岩村)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.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"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.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."라고 말하고 사라졌다. 그 후 달이 차서 진평왕 48년(626)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(曺) 자가 붉게 쓰여 있었다. 이것을 본 학사는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은 조(曺), 이름은 계룡(繼龍), 자는 인경(鱗卿)이라 하사하였다고 한다. 뒤에 진평왕이 그를 [[부마]]로 삼음으로써 창성부원군(昌城府院君)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 총지휘제군사(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總指揮諸軍事)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(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)에 이르렀다. 그러나 [[조(성씨)|조(曺)씨]] 성을 가진 인물에 대해서는 [[삼국사기]], [[삼국유사]], 심지어 필사본 [[화랑세기]]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. 조계룡이 진평왕의 부마라고 하지만 그가 실제 어떤 공주와 결혼하였는지는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. 진평왕의 딸은 [[선덕여왕]], [[천명공주]], [[선화공주]] 세 사람이 알려져 있으며, [[천명공주]]는 [[김용수(신라)|김용수]]에게, [[선화공주]]는 [[백제]] [[무왕]]에게 시집 갔다. [[선덕여왕]]은 삼국사기에는 남편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삼국유사와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남편이 여럿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. 그리고 626년생이라는 조계룡을 진평왕이 사위로 삼았다고 하는데, 진평왕은 632년에 죽었으므로, 이야기대로라면 진평왕은 많아야 7살 난 어린아이를 공주와 혼인시킨 것이 된다. 또한 실제 신라는 [[부원군]]이라는 작호를 쓴 적이 전혀 없었으며[* [[무열왕]] 때까지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썼다.], 조계룡이 받았다는 여러 벼슬 중 하나인 보국대장군 작호는 [[진평왕]] 대에도 존재하기는 했으나,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에서 쓰던 벼슬이었다.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받은 작위와 관직은 모두 그보다 후대인 [[고려]]의 것에 가깝다. 또한 그의 외조부 이광옥이 한림학사를 지냈다고 하여 한림대(翰林臺)[* 통일신라시대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곳으로 신라의 한림대는 당나라의 한림원(翰林院)을 모방하여 경덕왕 대에 종래의 통문박사(通文博士)를 개칭한 것으로, 거기에는 한림랑·한림대조(翰林待詔)·한림서생(翰林書生) 등의 관원이 있었다. 이들은 이른바 한림대의 학사직(學士職)으로, 이 관직에는 문장과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. 특히 한림대의 최고 관직인 한림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당대의 문사(文士)들로써 충당하였고, 6두품 출신이 이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. 한림랑에는 관등이 사찬(沙飡) 정도인 사람이 임명되었다. (출처: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)]의 직위를 역임한 것으로 보이는데, 한림대의 본래 명칭인 통문박사(通文博士)가 한림대로 개칭된 것이 이광옥이 살던 시대보다 후대인 [[경덕왕]] 대이기 때문에, 위 전승은 후대에 조상을 미화할 목적으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. 조계룡 이후의 세계(世繼)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고[* 창녕 조씨 [[족보]]에 따르면 조계룡으로부터 조겸까지는 기록이 실전되어 조계룡-조응신-조수형-조돈-조흠-조겸 겨우 6대만 있다. 진평왕의 재위기(579~632)에서 신라 말까지의 시간적 간격은 약 300년 정도인데,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겨우 180년밖에 안 되고 교차검증이 어려우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다. 다만 [[족보]] 문서에도 나와 있듯 다른 많은 집안들 또한 시조와 그로부터 몇 세대까지는 전설이나 설화의 영역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다. 이러한 전승은 오늘날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으니, 조선 중기의 사람인 [[김종직]]마저도 자신의 선조에 대한 고찰에서 이렇게 전승된 자신의 시조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준다. 비단 족보가 아니어도 행장록 등에서도 [[김억추]]와 같이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으니, 조상에 대한 기록을 무조건 역사적 사실로 믿기보다는 양반가에서 조상을 존숭하려는 의도로 기술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.] 신라 말 아간시중[* 아간(阿干) 또는 아찬(阿飡)은 신라 17관등 중 여섯 번째 등급으로,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상위 관등이었다. 아찬으로서 시중에 임명된 사람은 898년(효공왕 2) 아찬(阿飡)의 관등으로 시중에 임명된 계강(繼康) 등이 있다.]을 지낸 조흠의 아들 조겸이 [[고려]] [[태조(고려)|태조]]와 신덕왕후의 딸 덕공공주와 혼인하였으며 태악서승[* 태악서(太樂署)는 고려 시대에 음률의 교열(校閱)을 맡아보던 관아로, 충렬왕 34년(1308)에 전악서로 고치고 뒤에 여러 차례 전악서라는 이름과 번갈아 가면서 바뀌었다.]이란 벼슬을 지낸 기록이 있어 조겸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. 그러나 조겸과 혼인했다는 [[왕건]]의 딸 덕공공주라는 인물도 고려사 등 정사는 물론 야사에서도 보이지 않는 인물로, 조겸이 정말로 [[태조(고려)|태조]]의 부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. 또한 [[고려사]]와 [[고려사절요]]에서는 조겸 등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우며, 그 후손들에 대한 기록도 족보에만 전해질 뿐 다른 사료에는 전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, 역시 시조로서 미화되었을 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. 창녕 조씨 인물들이 정사에서 뚜렷하게 행적이 남겨진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다. 특히 [[위화도 회군]]으로 유명한 [[조민수(고려)|조민수]]를 꼽을 수 있는데, 조민수(曺敏修)는 창성부원군이라는 작위를 받은 바 있으며, 이것은 시조 조계룡이 받았다는 작위의 이름과 동일하다. 그리고 [[공민왕]] 때 찬성사에 오른 조익청(曺益淸)과 조민수의 막내 동생으로 밀직부사를 지낸 조경수(曺敬修), 고려 말 태학사를 지내고 [[여말선초]]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조의생(曺義生)[* 자는 원촌(遠村)]과 역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제학을 지낸 조희직(曺希直) 등이 있다. 또 조선 전기에 편찬된 [[삼강행실도언해]]에는 고려 고종 40년(1250)에 지금의 춘천 지역에서 몽골군에 항전하다 아내와 같이 불속에 뛰어들어 죽은 조효립(曺孝立)의 기록이 실려 있다. 창녕 조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. 조민수의 동생으로 [[태조(조선)|태조]] 때 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지낸 조익수(曺益修), [[세종(조선)|세종]] 시대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조상치(曺尙治), [[이시애의 난]]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영의정을 지낸 조석문(曺錫文), [[성종(조선)|성종]] 때 성리학의 대가로 두시언해와 만분가를 지은 대문장가 조위(曺偉), 조위의 동생으로 시에 뛰어났으며 중종의 명으로 2륜행실도를 편찬한 조신(曺伸), [[연산군]] 때 호조참판을 역임한 조계형(曺繼衡), [[광해군]] 때 공조참판을 지낸 조탁(曺倬), [[임진왜란]]에서 의병으로 활동하고 [[광해군]] 때 대구부사를 지낸 조응인(曺應仁), [[인조]] 때 합천군수를 지낸 조희인(曺希仁), [[인조]] 때 정주목사를 지낸 조정립(曺挺立), [[인조]] 때 창원부사를 지낸 조정생(曺挺生), [[인조]] 때 예조좌랑을 지낸 조시일(曺時逸), [[효종(조선)|효종]] 때 양산군수를 지낸 조시량(曺時亮), [[숙종(조선)|숙종]]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조효창(曺孝昌),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자 [[북인]]의 거두로서 [[임진왜란]] 당시 [[곽재우]] 등의 의병장들을 배출한 [[조식(조선)|조식(曺植)]],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때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조진구(曺鎭九)와 조진억(曺鎭億),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때 관찰사를 지낸 조시영(曺始永) 등이 이름을 날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